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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로 떠나는 방법


연두(이남실)
발달장애청년허브 사부작 활동가, 유예와 마카롱의 엄마이자 라떼 집사, 쓰고 그리고 만드는 것에 진심이며 너그럽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은 중년여성이다.



선도는 어디에

    딸이 만든 다큐멘터리 ‘이사’를 볼 때마다 내 모습이 낯설다. 올해 새로 맞춘 다초점 안경 때문만은 아니다. 자글자글한 주름, 낮은 목소리 톤과 느릿한 말투, 부산스러운 몸동작 모두 나인 것이 없다. 역시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을 알기 어려운가 보다. 내 눈이 몸 밖에 달려있다면, 가령 이마에 안테나처럼 길쭉한 연결부가 있고 그 끝에 눈이 달려있어서 내 눈으로 나를 볼 수 있다면 화면 속 내 모습이 좀 더 익숙하겠지. 불행히도 내 눈은 내 눈썹 밑에 딱 박혀 있다. 집 꼬락서니는 또 어떤가. 고양이 ‘라떼’가 긁어놓아 벽지가 너덜거리고 화분 너머로 보이는 베란다는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다. 화면 속 나는 탈서울을 꿈꾼다. 창을 열면 숲이 보이는, 서까래가 살아있고 툇마루가 있으며 아궁이에 불 때는 시골집에 살고 싶어 한다. 완연한 중년여성이 되면 욕망도 같이 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거기가 어디가 될지 몰라도 우선 ‘선도’라고 부르고 있다. 선도는 변재원 씨 장모님 이야기에서 나온 지명이다. 그분도 항상 도시를 떠나 선도로 가고 싶다고 하신단다. 거기가 어디냐 물으니 ‘이 나라에 섬이 수없이 많은데 선도라는 섬 하나 없겠냐’ 하셨단다. 그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나도 선도에 가고 싶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무슨 일을 하는가 못지않게 어디에 있는가가 그 사람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 왔다. 어디에 발을 딛고 서 있는가, 발이 어디로 향하는가가 그 사람이다. 주말에 어떤 이의 발은 산에 있고 어떤 이의 발은 편의점 계산대 안에 있다. 어떤 이는 지하철 안에 있고 어떤 이는 피켓을 들고 플랫폼에 있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는 이도 있겠고. 내 친구의 발은 접대를 위한 술집, 골프장을 전전하다 지금은 고향 과수원을 밟고 있다. 바둑에서 수를 두는 것처럼 인생에서 자신을 어디에 두느냐가 역사가 된다. 아직 서울에 사는 나는, 서 있는 곳과 서 있고 싶은 곳이 다르다. 누구는 그냥 가면 되지 않냐며 실천력의 문제로 보기도 하고, 누구는 배가 불러 그런다고 만족하며 살라 한다. 내게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별칭 마카롱)이 있다고 말하면 말이 없어진다.

    발달장애와 관련된 토론회나 회의에서 이제 나는 누가 물어보지 않는 한 발달장애인 가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22살 된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다고 말하면 ‘아, 그래서 이런 일을 하시는구나.’하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계기는 될 수 있어도 내 활동과 나를 다 설명할 수는 없는데 나는 순식간에 발달장애인 가족으로서만 규정된다. 선도로 가고 싶은 이유와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마카롱과 연관은 있지만 그것이 또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분명 내가 어떤 사람인가와 연관되어 있다.



원하지 않는 평화로움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재빠르게 욕망을 거세하는 방법을 기가 막히게 터득한 듯하다. 소백산 중턱에서 종갓집 넷째 딸로 태어난 나는, 여섯 살 때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 밥에 안칠 감자를 깎아 두었다. 사내 남, 열매 실 남실이란 이름부터 내 존재는 대를 잇기 위한 기원 정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래로 남동생 둘이 태어났다. 증조부모까지 4대가 한 데 사는 가부장 집안에서 눈치를 장착하지 않고는 고달파지는 건 나였기 때문에 ‘그러려니’를 좌우명 삼아 컸다. 그렇다고 내가 안 괜찮았냐 하면 아니다.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대체로 좋다.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고사리 꺾고 산딸기 따 먹으며 원 없이 놀았다.

    서울로 이사하고 나는 내내 시골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동생들이 어려서 까먹을까 봐 그림을 그려가며 시골집과 동네 이야기를 반복해 들려주곤 했다. 좀 커서 중학교 다닐 적에 미술 선생님이 내게 화가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수줍게 그렇다고 했더니 대번에 아버지가 뭐 하시냐 물으며 미술이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설명해주셨다. 나는 대답 대신 그림을 내 인생에서 지웠다. 친구 따라 가 봤던 미술학원에 나도 다니고 싶었지만 원하지 않음으로써 괴롭지 않도록 했다.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지레 차단하는 것은 버릇을 넘어 성격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삶을 경우의 수에서 빼두니 홀가분하고 평화로웠다. 나는 목표를 향해 달리기보다는 오는 사람, 처한 상황, 주어진 일을 맞이하고, 간다면 그냥 보내는 사람으로 살았다. 게으르게 살았냐고? 아니다. 내 조건 안에서 열심히 살아냈고 대체로 괜찮았다. 밥통 사건 전까지는.



내 밥통 돌려줘

    대학 2학년 자취를 할 때 친구에게 밥통을 빌려줬다. 어렵사리 돌려달라고 말을 꺼냈지만 무신경한 친구는 열흘이 지나도록 밥통을 돌려주지 않았고 그동안 나는 밥을 사 먹어야 했다. 살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내겐 친구의 자취방에 찾아가 밥통을 돌려달라고 울부짖던 날이 그런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원하는 것을 원하고 원치 않는 것을 거절하는 연습을 하고 또 했다.

    일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밥통을 빼앗긴 순간들을 수없이 경험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면 응당 요구받는 일들을 피할 수 없었고 사소하고 만만한 것에만 저항하고 진짜 바꾸고 싶은 것은 손도 못 대며 살았다. 연년생을 키우며 아이들을 업고 안고 많이도 돌아다녔다. 씩씩하게 육아를 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아플 때 병원 가기도 힘든 처지가 진저리 쳐졌다. 남편은 온종일 일해야만 했고 주변에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러다 놀이터에서 만난 이웃들과 품앗이로 함께 아이를 돌보며 살길을 찾았다. 아들의 장애를 발견한 이후로 내 발은 치료실도 오가게 됐으며 부모 모임이나 광장으로 향하기도 했다. 나는 큰일을 맞닥뜨릴 때 차분하고 대범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장애 진단을 받을 때도 그랬다. 욕망과 감정의 억압이 선물하는 순기능이다. 놀라움 안타까움 막막함을 딱 접고 앞으로 나아간다. 자폐성 장애에 대해 공부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어릴 때와 달라진 점은, 그 상황이 좀 지나고 나서 돌보지 않았던 내 감정과 욕망을 들여다봐 준다는 것.

    전형적이지 않은 아들을 키우며 내가 알게 된 것은, 바꿀 수 없다고 자포자기했던 거대한 구조에 대항하지 않으면 세상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품앗이모임이나 공동육아, 대안학교 같은 작은 공동체를 선택해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장애를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힘을 쏟았다. 지금 일하고 있는 발달장애청년허브 ‘사부작’도 그 연장선에 있다. 발달장애 청년들과 이웃들을 연결해 함께 활동할 수 있게 지원하는 일은 스스로 관계 맺기가 어려운 발달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이 일을 한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도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서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발판을 만드는 일을 지금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내가 아니어도 되는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도시에서 애쓰며 살아왔고 이제는 나를 선도에 데려다주고 싶다. 하지만 다큐 ‘이사’에 이사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마카롱에게 선도에 같이 가자고 하면 갈 줄 알았는데 나의 욕망과 아들의 욕망은 거리가 멀었다. 마카롱은 자신이 커온 서울 이 동네에서 살고 싶어 하며 아직은 나의 정서적, 물리적 지원이 필요한 상태다. 나는 선도를 가고도 싶고 마카롱 곁에 머물고도 싶다. 이 두 욕망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선도로 떠나지도, 선도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선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그 준비는 10년 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해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어도 되는 구조를 만들려면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외치고 발달장애청년허브를 만드는 일 외에도 할 일이 많다. 남편을 살림의 세계에 초대한 일도 그중 하나였다. 시모가 청바지와 티셔츠까지 다려 입히던 남편은 내 덕에 개과천선했다. 지금 우리집, 밥, 살림은 남편이 다 한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싶어도 인내심을 발휘해 가르쳤고 이제는 장보기부터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일까지 남편이 도맡아 한다. 내가 아니어도 굴러가게 만든 덕에 틈을 만들 수 있었고 내 방식대로 해방구를 찾았다. 처음엔 하루, 길게는 한 달 정도 여행을 다녔다.



나의 해방구, 선도

    지금 내 해방구는 그림일기다. 재작년부터 해오다가 수채화를 좀 배우고 싶어서 화실에도 다닌다. 화실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엄마한테 중학교 다닐 적 하고 싶었던 말을 말했다. “엄마, 나 미술학원 보내 줘.”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다고, 처음 한 달 치 회비만 내 달라고 했지만 엄마는 다음날 두툼한 봉투를 들고 찾아오셨다. 물감도 사고 종이도 사라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언니들은 잘했다면서 나는 주산학원, 나는 피아노, 나는 대학교, 하면서 저마다 원하던 것들이 뭐였는지 기억해내고 말했다. 선도에 가고 싶었으나 고려할 것들이 너무 많아 선도의 시옷 자로 못 꺼내며 살았던 중년의 여성들이 한바탕 자기 꿈을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면 선도는 어떤 장소만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다. 어떤 시간일 수도, 어떤 상황이나 활동일 수도 있겠다. 선도에 가서 나는 아침에 방문 열고 숲이나 바다를 보고 싶었다. 군불 때고 텃밭 가꾸며 툇마루에 앉아 그림일기를 쓰고 싶었다. 누구는 내가 거기 가서도 사람들을 조직하고 더 바쁘게 살 거라고 한다. 그래도 좋고. 요새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선도에 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지금 선도로 가는 중이거나 이미 도착해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