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주소없음
목발의 의견도 들어보자

변재원
변재원은 작가이자 소수자 정책 연구자이다. 어릴 적, 의료사고로 인한 척수 공동증으로 지체 장애를 갖고 있다. 최근 목발과 함께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다.



    “목발의 의견도 들어보자” 활동의 주요 목적은 장애인 운동의 숨겨진 단서인 보조기기를 주목하는 데 있었다. 대다수 장애인에게 보조기기는 장애인의 삶을 공유하지 않는 기계적 소모품처럼 인식된다. 장애인과 보조기기는 인간과 사물의 이분법적 도식 아래, 어떤 방식으로건 삶과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처럼 구분된다.

    할 수 없음(disabled)을 의미하는 장애는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된 신체의 기능적 정의에서 파생된다. 환자의 몸을 다루는 의료 전문가들은 할 수 없는 이(the disabled)들의 신체적 조건을 고려하여, 사회 적응을 돕는 보조기기를 ‘처방’한다. 당사자에게 처방된 보조기기는 가시화된 신체적 무능력의 다른 모습일 뿐이며, 사용 기한이 정해진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 장애인은 자기 신체에 부착된 ‘기계’를 두고 신체의 연장성(extension of body)을 느끼지도, 비인간 사물의 주체성을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저 쓰다 버려지고 말 게 될 것. 장애인의 손에 쥐어진 저마다의 “목발”들은 별도의 존재 의미를 지니지 않는 한낱 덩어리(things)일 뿐이다.
보조기기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은 오직 기술자만의 과제로 남은 현실이다. 그들의 고민도 물화된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염두하는 ‘더 나은 물건’에 대한 고민은 사실상 성능 향상(enhancement)과 동의어일 뿐이다. 이처럼 보조기기의 의미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오직 기술적 접근(technical approach)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은 장애를 몸의 손상 문제로 고립시키는 데 일조한다.

    장애인이 꿈꾸는 자립적인 삶(independent living)이 주변의 이웃에게 기꺼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자기결정적이고 주체화된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야스토미 아유무, 2018),1) “목발” 등은 의료보조기구의 일종을 넘어, 자기결정적이고 주체화된 가능성을 제공하는 실존적 단서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목발을 존재로서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고정주소없음> 팀과의 회의를 통해 장애와 보조기기 간의 상호작용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에 있어 적극적인 현장 참여와 관심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말한 바와 같이, 경험과 이론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이론 없는 경험은 맹목적이고, 경험 없는 이론은 지적 놀이일 뿐(experience without theory is blind, but theory without experience is mere intellectual play)”이기 때문이다(Bertalanffy, L, 1973)2). 개별 문헌 속 이론만으로 장애인과 보조기기의 경험과 질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당사자에게 비인간적 사물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우선적 책임이 있다.

    이에 실용주의적 인식론에 기반하여, 비인간사물의 입장으로 구술하는 예술-연구를 진행했다. 오늘날 미국의 경험주의 연구를 꽃피운 철학적 기반인 실용주의(pragmatism) 연구자들은 연구 대상의 경험을 중요시했다.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실용성 역시, 당연하게 여겨지는 비인간적 사물의 경험을 상상의 힘을 통해 자유롭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 “히스테리안” 연구팀과 함께 <고정주소없음>을 통해 진행한 관객 참여 예술이 바로 그러한 실용성의 일환에 해당한다. 장애인 운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서 상상하는 기존의 방식을 뒤집어, 장애인이 활용하는 보조기기(목발)가 되어 봄으로써 새롭게 접근성과 이동권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2022년 전개된 장애인 지하철 시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것이 ‘장애인의 이동 불편’으로 비롯되었다는 고정관념을 넘어, ‘장애인의 보조기기가 지하철에 접근할 수 없었다’는 보다 급진적인 관념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도움이 되었다.

    <고정주소없음> 프로젝트를 통한 비인간화 시도는 필연적으로 질문 바꾸기 과정을 요구한다. ‘장애인은 무엇이 불편한가?’라는 전규범적 수준의 질문으로부터 벗어나 ‘장애인과 함께하는 보조기기의 삶은 어떤가?’라는 관점으로 전환함으로써 구체적이고 경험적 차원의 진술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 바꾸기 과정은 장애인의 이동권을 경험적 수준에서 이해하도록 돕고, 인간과 비인간-장애를 가진 몸과 장애를 지탱하는 사물-의 외면된 현실적 연결 고리를 찾게 하며, 다각적 이해를 유도한다.

    비인간의 관점으로부터 나아간 질문 바꾸기 과정은 참여자들에게 개별적인 귀추(abduction) 판단을 요구했다. 귀추는 미국 철학자 피어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가 고안한 실용주의적 논증 방법론으로, 기존 논리학에서 활용되던 연역과 귀납과는 다른 가설의 방법이다. 그 예시는 아래와 같다.


놀라운 사실 C가 관찰되었다.
② 그러나, 만일 A가 옳다면, C는 당연히 일어날 일이다.
③ 따라서, A가 옳다고 짐작할 이유가 있다.


    아래는 피어스의 귀추 논리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도록 실용적인 가설 생산 양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정용재 외, 2006)3)


Peirce의 귀추적 관점에 기반한 과학 연구의 가설 생성 양식

[문제상황]
다음과 같은 상황(사실)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현상 C“_”는
이상하다(믿기 어렵다. 있을 수 없다).

[추리]
그런데 만약 A“_”가 참이라면, C는 이상하지 않다(믿을 수 있다. 있을 수 있다).

[가설]
따라서, A“_”가 참이라고 여길만한 이유가 있다(참이라 주장할 만하다).



    위의 귀추적 논리를 우리 프로젝트에 적용해보자. 관객은 비인간적 사물로부터 ① ‘놀라운 사실’을 파악하고, ② 추리를 통해 ③ 가설을 수립해야 한다.
먼저, 휠체어가 된 관객들은 문제 상황에서 자신이 휠체어라는 것을 인식하고, 휠체어가 접근성이 보장되지 않았을 때 겪는 어려움과 납득할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다음, 추리 상황으로 나아가 이들은 자기 눈앞에 놓인 장애물과 제약 상황으로부터 자신의 ‘동행자’인 장애인 당사자의 소외된 마음을 서서히 바라보고, 사회적 문제와 대안을 인식한다. 그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면 이들이 느꼈을 슬픔도, 휠체어로서 자기 자신이 경험했을 제약도 불필요했을 것이라는 식이다.
마지막 가설 단계에 이르러서는 엘리베이터 설치 필요성이 비단 장애인 당사자만의 편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인과 동행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문제임을 이해하고 논의를 확장하게 된다.

    참여예술에서 비인간적 사물의 입장이 되어보는 경험을 다시 진술하는 것은 ‘질문 바꾸기 과정’과 ‘귀추적 관점’의 활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감각을 확장하고 이로부터 귀결되는 세계를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조기기가 덩어리(things)가 아니라, 존재(existence)로서 의미를 진술할 수 있게 될 때 사물의 연립(interdependence) 가치를 이해할 수 있고, 불가능한 자(disabled)가 아니라, 행위자(actors)로서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주체화(subjectification)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보다 많은 비인간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이다. 





1) 야스토미 아유무,박동섭 역, 『단단한 삶: 나답게, 자립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경기: 도서출판 유유, 2018년.
2) Von Bertalanffy, L. (1973). The meaning of general system theory. General system theory: Foundations, development, applications, 30, 53.
3) 정용재, & 송진웅. (2006). Peirce의 귀추법 양식을 이용한 교육대학생들이 생성한 가설의 특징분석. 「초등과학교육」, 25(2), 126-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