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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불온한 잉여들의 부랑과 서식 그리고 저항

최현숙
사회운동과 진보 정치 여성주의 활동을 거쳐 2008년부터 노인복지 현장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구술생애사 작업을 시작했다. 현재 생애사와 소설을 쓰며 홈리스 현장에 집중하고 있다.



    과연 기후재앙이구나 싶었던 작년 8월 폭우 때 “반/지하”가 갑작스런 주목을 받았다. 거기서 사람이 죽었고, 그러니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언론과 SNS가 한바탕 빈곤 포르노로 수선을 떨고 정치인들이 몰려가 갖은 쇼를 하며 빈말들을 내뱉었다. 늘 그래왔듯, 폭우가 지난 후 곧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하와 반지하와 옥탑과 쪽방과 고시원과 거리에는 사람이 살아왔고, 살고 있고, 계속 살아갈 것이다.
무학의 이석기(66세 남, 가명) 씨는 평생 노숙과 리어카 잠과 창고 잠을 오락가락하다 1년 전에야 양동 쪽방촌의 사방 막힌 약 6㎡ 쪽방(방을 쪼개고 쪼개서 만든 방)에 살게 되었다. “주거 조건이 어떻게 개선되기를 바라시느냐?”는 주거권 활동가의 질문에, 그는 ”죽을 때까지 이 방 하나면 충분하다. 여기서 쫓겨나지만 않으면 좋겠다.”라고 답했다. 당사자의 처지에서 나온 말은 자주 듣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쪽방의 평당 임대료는 강남의 타워팰리스보다 비싸다. 그 쪽방촌 건너편에 있는 서울역의 앞마당이 ”노숙인 광장“이다. 서울역의 역사보다 더 오랫동안 이석기들과 김영숙(가명)들이 쪽방촌과 광장 사이를 들며 날며 살아왔다. 요행히 공공임대주택을 얻어가는 홈리스들 중에는 이곳이 그리워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 여기가 내가 사는 곳이란다.

    노숙인 광장은 신자유주의와 가족중심주의 사회에서 밀려난 불온(不穩)한 잉여(剩餘)들이 부랑(浮浪)하고 서식(棲息)하는 장소다. 밀려난 사람이 나냐 너냐의 차이가 있을 뿐, 개인이 아닌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구조가 밀쳐낸 잉여들의 광장이다. 저 사회에 정주(定住)하며 번성하고자 하는 비노숙인들이 밀어낸 자리에서 홈리스들 대부분은 사회복귀를 포기하게 된다. 대신 광장과 거리에서 살아갈 역량을 배우고 익숙해지면서, “지금, 여기”의 필요와 가능성 속에서 즉자적이고 탈규범적이고 개별적인 욕망들을 좇으며 살아간다. 신자유주의와 가족 중심 사회가 경쟁과 이기와 배타에 매진하느라 밀쳐내 버린 모든 것들이 서울역 광장에 퇴적하고 있다. 서울 중구 한강대로 405, 서울역광장의 주소이자 홈리스들의 주소이다. 그들은 이 주소에 거주하면서도 그곳이 행정상 거주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비시민으로 취급당한다. 내일과 계획이 없이, 희망도 전망도 없이, “지금 여기”를 살아간다. 불법과 일탈, 피해와 가해, 불결과 무질서, 쓸모없음과 무책임이 널려있고, 정신질환과 알콜 중독과 흡연 비율이 최고조다.

    부랑인에 대한 정화(淨化)를 목표로 한 단속과 수용의 역사가 독재정권에서는 ‘형제복지원’, ‘삼청교육대’, ‘선감학원’ 등 거리와 광장에서 아이들과 성인들을 실제로 쓸어 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면, 소위 민주적 선거를 통해 만들어진 정권들은 차마 그렇게까지 퇴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시와 중구청과 한국철도공사는 노숙인들이 생존을 위해 마지막까지 남긴 살림살이를 압축청소차에 쓸어가고, 긴 의자에 칸막이를 치고, 앉아 쉬던 공간에 화단을 만드는 방식으로 그들을 몰아내고 있다. 그래도 흩어지고 쫓겨나고 잡혀갔던 사람들은 늘 다시 모인다.

    여성 홈리스들은 더 가혹한 상황을 산다. 성폭력과 성매매와 성애적 관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 어떤 여성 홈리스들은 공중화장실이나 적은 돈을 내는 만화방, 게임방, 찜질방을 찾아 들어간다. 혹은 어떤 남성 노숙인의 여자로 살아가기를 선택하지만, 그 남성에게 폭력과 금전 갈취를 지속적으로 당하기 일쑤다. 광장 한편에서는 ‘노숙자 예수’를 팔아 돈을 빨아대는 종교 꾼들의 경전 소리와 통성기도와 찬송가와 춤들로 아수라(阿修羅)판이 벌어지는가 하면, 다른 편에는 거부와 침묵, 자기 소외와 은닉이 웅크리고 있다. 당사자들 간의 규범과 질서도 없이, 불안정하고 불연속적인 관계와 단절이 반복되다가, 끝난다. 누군가 한동안 안 보이면 죽었거나, 병원이나 시설로 갔거나, 가깝고 먼 다른 곳으로 이주 중인 것이다. 근로 시장과 가족에서 이탈한 노숙인들은 시간이 남아돌거나, 무료 급식과 교회 꼬지(돈이나 음식을 주는 종교기관 등을 돌아다니는 일) 시간에 맞추느라 종일 여러 곳을 부랑한다. 천만다행으로 기초수급자가 된 홈리스들은 매달 20일에 시작하는 최저생계 사이클을 반복하며 어쨌든 한 달씩 살아낸다. 비노숙인들은 결코 되지 말아야 할 얼굴로 거울삼아 노숙인들을두려워하고 혐오하면서, ‘정상’과 ‘성실’에 매진하러 광장을 바쁘게 지나간다. 지하철과 기차 대합실과 버스와 택시 승강장을 거쳐, 생산과 소비 시장으로 빨려 들어간다.



난잡한 돌봄1)과 저항

    한편 완전히 밀려나 회귀 불가능한 재난 상황이야말로 닥치는 대로여서 더 진정한 돌봄과 저항의 거점이 된다. 시장과 가족과 정상성에 아직 목을 매고 있는 한, 배수진의 저항은 불가능하다. 폐허(廢墟)2)여서 오히려 호혜의 거점이며,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연대와 반격을 가능하게 한다. 홈리스들의 ‘없음(less)’이야 말로 그들의 밑천이고 자원이며 터전이다.

    때로 모호하거나 불가해한 이유로 “배때기에 칼을 쑤셔버리겠다.”며 폭발하는 성질머리의 빵쟁이 삭발 여성 홈리스 김영숙은, IMF 때 노숙으로 추락한 삼촌들에게서 돈을 모아 거리의 아이들에게 국수와 밥과 김치를 챙겨 먹이며 같이 살았던 서울역 옆 서소문 공원에서의 기억과 서울역 대합실 노숙인 퇴거 조치에 맞선 대합실 점거 농성 경험을 신바람 나게 풀어낸다. 60대 초반 남성 홈리스 장 씨는 주변 가장 심난스러운 노숙인을 옆자리에 데려다 재우며, 휴대용 버너에 찌개를 끓여 밥을 먹이고 병을 돌본다. 작년 1월 광장에서 얼어 죽은 한 노숙인의 추모 자리에 그는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냈다.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국가 선진국으로 나라는 부자이지만 서민은 가난한, 세계 최상위 빈부격차의 양극화 나라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는 거짓말은 허구일 뿐이다. <...> 우리 노숙인들은 <...> 부자만을 위한 나라 정책과 제도에 희생양이 되어 지금의 처지에 내몰렸다. <...> 노숙 생활이 결코 우리들이 나태하고 게을러 된 내 탓만이 아니라 나라의 책임이 더 큰 것이기에 비록 구차한 생활이라도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우리들의 권리를 주장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지 지원을 최대한 당당히 받아내야 한다.“

    ‘홈리스행동’과 ‘빈곤사회연대’ 등 반빈곤 단체들이 모인 “아랫마을‘에서는 홈리스 당사자 활동가와 인권 활동가와 자원 활동가들이 모여 매일 두 끼씩 공동식사를 하고 야학을 운영한다. 광장과 쪽방촌으로 아웃리치를 나가고 반빈곤 투쟁을 함께 하면서 장애인과 노점상, 성소수자와 기후 위기 등 오만가지 의제의 연대 투쟁을 수시로 쫓아다닌다. 1년 중 가장 밤이 길고 추운 12월 22일 동짓날이면 노숙인 광장에 모여 한 해 동안 거리에서 사망한 죽음들을 기리는 ‘홈리스 추모제”는 22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난민, 동물권, 성노동, 여성주의, 반성매매, 플랫폼 노동 등 야학 교사들의 주요 활동 의제들은 아랫마을의 확장성을 드러낸다. 가장 끝자리에서 희망 없이, 하염없이, 최대한 즐겁게, 저항을 넓혀나가고 있다.





1) 더 케어 콜렉티브 (2021), “돌봄 선언”, 니케북스.
2) 레베카 솔닛 (2012), “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펜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