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주소없음
접근권에 대하여
강병우
히스테리안 연구자
히스테리안 연구자
접근권은 일반적으로 물리적 환경과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진입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지만, 의미가 체현하고 구체적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에로의 접근이라는 포괄적인 의미까지 포함한다. 소수자정책연구자 변재원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접근권’을 자기존중과 연관 지으며 붕괴되지 않는 삶의 근본권리로서 설명하고 한다.
근본 권리로서 접근권은 첫째 공동경험의 공간적 최소 단위로서 커먼즈/공동체로의 진입 권리다. 이러한 성격은 인간이 공동체 내에서 협상력을 지닌 하나의 구성원으로 가지게 될 필요조건이며 권리를 근거 짓는 평등(isonomia) 개념의 실현조건이 된다. 둘째 오늘날 모빌리티 능력에 대한 강조가 그것의 결손이라 여겨지는 부동성―예컨대 장애와 홈리스―을 행위성 박탈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동성 자체가 부동성에 조건화되어 있단 사실, 모빌리티 사회의 화려한 겉면이 접근권이 제기하는 권원성을 가리고 있다. 접근권은 ‘부동성’을 경유해서야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행위성이 박탈됐다고 여겨지는 임모빌리티의 출현은 공동체 공간 자체를 문제화한다.
정치 공간의 출현을 문제화하는 힘을 접근권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정치테제의 초월론적인 조건이 된다. 출현의 장소는 타자와의 조우가 예견되는 곳으로 어떤 마주침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의미 발생의 선험적 조건이자 그 자체가 의미의 영도이기도 한 이곳을 민주 연구자를 따라 ‘보이드’라 정의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보이드 공간은 의미의 외부나 무를 상징하기보다 출현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재배열과 마주침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前)주체적 형성 과정과 신비주의의 베일이 덮여 있는 사물에 대한 ‘놀라움(θαυμάζειν)’이 여전한 곳이기에, 이곳에서 반복되는 것은 관계의 전도/전복 그리고 변환이다.
공공성을 단순히 몰개인적인 공유가치라고 여기는 기존의 이해를 확대하고, 오늘날 커먼즈에 대한 지엽적인 번역을 넘어 하나의 권리로 이해해야 한다. 장소-정체성의 형성과 접근권이 ‘권리를 가질 권리’인 권원성의 바탕이 된다. 이 테제의 인식론적 근간이 되는 민주 연구자의 보이드 개념은 결코 개인성이 삭제되거나 쏟아낸 텅 빈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안점은 정체성이란 행위성에 기반한 커머닝 효과라는 것이지 ‘고정주소’를 지닌 본질도, 비어있는 추상적-형식적 주체도 아니다. “인식론 근저에 놓여 있는 사실”로서의 객체는 행위의 측면에서 출몰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란 사실이다.
공공성을 위와 같은 커먼즈로 이해할 때 비로소 공공예술《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를 출현시킬 수 있다. 오드라데크를 출몰하는 객체 즉, 그 자체가 이미 커머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넝마주이-예술가’ 형상으로 재구성하는 비평적 작업에서 밝혔다. 공공예술은 이러한 정치적 공간의 출현에 깊이 개입이 되어 있으며, 예술 자체가 커머닝 효과라는 것을 시사했다. 이러한 비관계에 놓인 오드라데크-타자와 조우하기 위해 허구/픽션/서사가 매개로서 자리하며, 공공예술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는 우리의 구체적 행동이 매체가 되는 보이드-작품을 구성하는 것을 어렴풋한 시아에 두고 있다.
근본 권리로서 접근권은 첫째 공동경험의 공간적 최소 단위로서 커먼즈/공동체로의 진입 권리다. 이러한 성격은 인간이 공동체 내에서 협상력을 지닌 하나의 구성원으로 가지게 될 필요조건이며 권리를 근거 짓는 평등(isonomia) 개념의 실현조건이 된다. 둘째 오늘날 모빌리티 능력에 대한 강조가 그것의 결손이라 여겨지는 부동성―예컨대 장애와 홈리스―을 행위성 박탈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동성 자체가 부동성에 조건화되어 있단 사실, 모빌리티 사회의 화려한 겉면이 접근권이 제기하는 권원성을 가리고 있다. 접근권은 ‘부동성’을 경유해서야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행위성이 박탈됐다고 여겨지는 임모빌리티의 출현은 공동체 공간 자체를 문제화한다.
정치 공간의 출현을 문제화하는 힘을 접근권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정치테제의 초월론적인 조건이 된다. 출현의 장소는 타자와의 조우가 예견되는 곳으로 어떤 마주침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의미 발생의 선험적 조건이자 그 자체가 의미의 영도이기도 한 이곳을 민주 연구자를 따라 ‘보이드’라 정의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보이드 공간은 의미의 외부나 무를 상징하기보다 출현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재배열과 마주침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前)주체적 형성 과정과 신비주의의 베일이 덮여 있는 사물에 대한 ‘놀라움(θαυμάζειν)’이 여전한 곳이기에, 이곳에서 반복되는 것은 관계의 전도/전복 그리고 변환이다.
공공성을 단순히 몰개인적인 공유가치라고 여기는 기존의 이해를 확대하고, 오늘날 커먼즈에 대한 지엽적인 번역을 넘어 하나의 권리로 이해해야 한다. 장소-정체성의 형성과 접근권이 ‘권리를 가질 권리’인 권원성의 바탕이 된다. 이 테제의 인식론적 근간이 되는 민주 연구자의 보이드 개념은 결코 개인성이 삭제되거나 쏟아낸 텅 빈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안점은 정체성이란 행위성에 기반한 커머닝 효과라는 것이지 ‘고정주소’를 지닌 본질도, 비어있는 추상적-형식적 주체도 아니다. “인식론 근저에 놓여 있는 사실”로서의 객체는 행위의 측면에서 출몰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란 사실이다.
공공성을 위와 같은 커먼즈로 이해할 때 비로소 공공예술《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를 출현시킬 수 있다. 오드라데크를 출몰하는 객체 즉, 그 자체가 이미 커머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넝마주이-예술가’ 형상으로 재구성하는 비평적 작업에서 밝혔다. 공공예술은 이러한 정치적 공간의 출현에 깊이 개입이 되어 있으며, 예술 자체가 커머닝 효과라는 것을 시사했다. 이러한 비관계에 놓인 오드라데크-타자와 조우하기 위해 허구/픽션/서사가 매개로서 자리하며, 공공예술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는 우리의 구체적 행동이 매체가 되는 보이드-작품을 구성하는 것을 어렴풋한 시아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