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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근성
재미와 의미를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은 시각예술가. 재미는 여럿이 모일수록 커진다고 생각, 지근거리 사람들과 창작 콜렉티브 피스오브피스를 결성하여 문화기획, 예술작업, 디자인 등 활동 범위를 넓혀가며 놀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는 ⟪자투리잡화점⟫, ⟪서울아까워센타⟫ 등이 있다. 최근에는 넝마주이를 브리콜뢰르(bricoleur)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다.


공원

    아기의 허리에 힘이 생겨 유아차에 앉을 수 있을 무렵부터 아기와 함께 공원에 나간다. 공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공공간이다. 집 근처에는 운이 좋게도 3개의 어린이공원이 있는데 각각 장단점이 있다. 두텁바위 어린이공원은 온 사방 철조망이 쳐져 있다. 3년 전 홈리스 문제로 용산구청 공원녹지과에서 이곳을 폐쇄했다. 새나라 어린이공원은 집에서 제일 가깝지만 오전엔 경로당 어르신들의 게이트볼장으로 변한다. 탁탁 부딪히는 공 소리가 아기의 낮잠을 방해한다. 새꿈어린이공원은 철조망도 게이트볼장도 없다. 대신 금주와 금연 팻말이 무색할 정도로 매일 같이 술판이 벌어지고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나야 괜찮지만 면역력이 약한 아가에게 좋을 리 없다. 요령을 찾은 것이 오전에 새꿈어린이공원 담배연기를 피해 구석에서 아이의 낮잠을 재우고 문화역서울에 가서 전시를 보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 새나라 어린이공원에 가는 게 하루 루틴이 되었다.

    학창 시절 매일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같은 시간 같은 자리 앉아 있는 또래 친구들에게 관심이 생기듯 매일 공원에 나가다 보니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들에게 관심이 생겼다. 쪽방촌 한가운데 자리 잡은 어린이 없는 어린이공원은 여러 쪼개진 방들을 잇는 거실이자 마당 역할을 한다. 공원 형태도 독특한데 둔덕에 있어 1층과 2층으로 공간이 계단식으로 나눠져 있다. 주로 1층은 집이 없는 노숙인들이 사용하고 2층은 기초수급을 받는 쪽방촌 주민들이 이용한다. 종종 노란 조끼를 입은 홈리스 재활 봉사단과 도시락을 나눠주는 종교 봉사 단체가 이들의 안부를 물으러 오고, 녹색 조끼를 입은 공원관리사 한 분이 근무시간 동안 종횡무진 나뒹구는 술병과 담배꽁초, 각종 쓰레기를 연신 줍는다. 공원관리사는 아기가 올 곳이 못 되니 다른 공원에 가라고 하신다. 당신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간접흡연이 싫어서 흡연을 시작했다고 하면서. 6년째 일하고 있는 그는 매년 심사를 통해 재계약 갱신을 하고 있는데 새꿈어린이공원은 다른 공원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고 했다.
매일 같이 유아차를 끌고 오는 내가 이상했는지 이곳을 먼저 선점한 이들은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이제 반기기까지 한다. 아기가 몇 달 되었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그들끼리의 화제가 저출산 문제, 아이와 얽힌 본인의 과거사 등으로 갑자기 바뀌기도 한다.

    새꿈어린이공원에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새로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다. 여기선 나만 빼고 모두 친하다. 묘한 연대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누군가 술에 떡이 되어 인사불성 상태이면 다른 이가 그를 방으로 옮겨준다. 누군가 자리를 비워 도시락을 못 받으면 다른 이가 그 대신 받아둔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에게 슈퍼에서 400원짜리 믹스커피를 배달해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깨끗하고 쾌적한 임대주택을 고사하고 재개발 이슈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이 동네에 다시 돌아오는 것은 어쩌면 주거환경보다 ‘서로 돌봄’ ‘연대’ ‘동병상련’ ‘상호보존’ 따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나는 동네 친구 하나 없네.



광장

    ‘아이고 시간이 이렇게 됐네. 서울역 롯데마트에 가서 장 좀 보고 문화역서울 전시도 보러 가야겠다.’ 공원을 나와 서울역 광장으로 가는 큰길 횡단보도를 건너면 길 위에서의 삶을 조금 더 엿볼 수 있다. 몇몇 무료급식소 앞은 식사하려는 이들로 항상 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는데, 요즘엔 또 다른 줄이 하나 더 생겼다. 제주도 청년들이 제주산 고기로 돈가스를 아주 맛있게 만든다는 ○○식당이다. 멀리서 돈가스를 먹기 위해 온 사람들이 데이트를 위한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몇 시간씩 기다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한 시간 이상 기다릴 자신 없다. 더군다나 식당에는 유아차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그래서 아기 부모들이 대형 쇼핑센터에만 가는지도 모르겠다. 이색적인 두 행렬의 끄트머리까지 가면 드디어 서울역 광장이 나온다.
나는 이곳을 매우 좋아한다. 기차 여정으로 참았던 담배 연기를 서로 뿜어대는 사람들. 대결이라도 하듯 데시벨만 높은 각종 종교들의 찬송 소리. 종북좌파 척결을 외치는 사람들. 8차선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 그리고 그 광장 한가운데서 중도를 지키는 듯 앉아있는 노숙인들. 무언가를 분출, 배설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인간은 그리스 아고라 때부터 광장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문화역서울에 크게 붙어있는 <공공디자인페스티벌 : 길몸삶터> 현수막 아래 한 노숙인이 기대어 앉아있다. 덕분에 나는 이번 전시가 ’길 위에서 몸뚱어리 하나만으로 간신히 견디고 있는 삶의 터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을 대번에 이해했는데, 어찌 된 일인가? 전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그런 내용은 전혀 아니다. 아니 이런! 홍보 중이던 문화역서울 전시는 아직 준비 중이다. 게다가 롯데마트는 휴무일이다. 마트도 전시도 죄다 허탕이다. 집에 돌아가야겠다. 어, 그런데 이 냄새는 뭐지? 퀴퀴한 은행 냄새가 난다! 가을이구나. 아기에게 생애 첫 은행 냄새와 은행나무를 보여준다. 아기는 관심이 없는지 다시 잠에 든다. 왔던 길을 돌아 집에 온다. 유아차 바퀴로 은행 몇 개를 밟았더니 은행 냄새가 집 앞까지 함께 왔다.

    홈리스들가 점거한 새꿈어린이공원은 얼핏 보면 푸르른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자세히 보면 쓰레기 더미들로 싸여있다. ‘집 앞에 있는 녹지를 누리지 않을 까닭이 도대체 무엇이냐’며 나는 권리 찾기에 나서기로 한다. 6개월 아이를 태운 유아차를 밀며 그들의 공원에 입장한다.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던 홈리스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아차에 꽂힌다. 그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으며 적당한 자리를 찾는다. ‘아침부터 소주와 막걸리라니…’ 퀴퀴한 담배 연기와 술에 취한 이들의 고성이 넘실대지만 나 또한 당당히 공원의 여가를 사수한다. 이렇게 처음 그들의 어린이공원에 입성할 때만 해도, 나는 그들이 품격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원 사수 궐기는 매일 오전 나의 루틴 활동이 되었다. 출근하는 짝꿍을 서울역 지하철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어린이공원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정오 전까지 더위를 피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유아차를 끌고 앉아있을 뿐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궐기임이 분명하다. 마주치지는 않지만 낯선 이를 대하는 낯선 눈빛을 서로 의식하고 있었으니까.

    그로부터 한참 동안 매일 같이 공원에 출근하면서 알게 됐다. 그들끼리도 모이는 사람들이 있고, 모이는 자리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를 치우는 법이 없다. 오히려 ‘이 자리가 내 자리’라는 것을 나뒹구는 술병과 각종 쓰레기로 표시한다. 그 쓰레기는 우리 눈에는 그저 비슷한 쓰레기일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모두 각기 다른 모양이라, 네 것과 내 것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매일 아침 비정규직 공공근로자들이 공원을 치우기가 무섭게 다시 술병과 찢어진 종이박스로 헝클어트리며 그들만의 질서를 회복한다. 이제는 내가 그들이 익숙해진 만큼 그들 역시 내가 있는 풍경이 이상하지 않다. 슬며시 다가와 유아차에 있는 아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아기가 몇 살인지, 엄마는 어디 있는지 묻기도 한다. 술병, 종이컵, 담배꽁초로 가득한 어린이공원에 그렇게 내 자리가 생겼다. 나는 쓰레기로 내 자리를 표시하지 않지만, 그들은 내 자리를 비워놓는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저서 『슬픈 열대』에서 인류학자에게 의미 있는 대상은 저 밖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타-문화가 아니라 다른 삶을 바라보며 자기 삶의 어리석음을 깨달아 가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내가 감히 품격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그들을 통해 ‘품격’이란 것의 ‘허상’을 본다. 계급을 논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방패 시스템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우둔함을 깨닫는다. 그들만의 흔적 남기기는 품격 따위보다 더 절실한, 그들의 존엄을 사수하기 위한 궐기에 가깝다. 유아차를 들이밀며 내가 나의 권리를 주장했듯이 그들도 그들의 흔적을 남기며 자리를 찾고 있을 뿐이다. 그들과 마주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내 스스로가 품격이란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도울 마음이 없다. 단지 이웃으로 대하고 싶을 뿐이다. 남을 남인 채로 두는 공존의 기술을 터득하고 싶을 뿐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로 전날 몇 명이 술을 마셨는지, 몇 명이 노숙을 했는지 유추해본다. 나뒹구는 술병과 담배꽁초의 배치를 바꿔 교묘히 사인(표식)을 만들어 놓되 치우지는 않는다. 우리만이 아는 행동으로 말을 건넨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진다. 공원 관리자에 의해 치워진다. 다시 나뒹군다. 재배치한다. 치운다. 자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알고 있다고 답한다. 사라진다.

    의도적 진부화로 쪽방촌 주민을 내쫓고 그곳에 이권을 챙기려는 사람. 선한 마음으로 타인을 돕는 사람. 선교하는 사람. 홈리스를 사회적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이웃도 있다고. 약간 이상한 예술을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