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을: 거주 가능성을 탐색하다>

이산

Artist

이산
이산은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비가시적, 비물질적, 비언어적 요소를 탐구한다. 존재 간의 상호 관계성이 생성하는 불특정 현상을 기록하고 이를 ‘투명화 전략’이라 명명한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 출몰 개요


✧ 출몰지
전주 ‘stayfoolish-그리고’ 현장(전주남부시장 문화공판장 작당)

✧ 출몰 일시
2023. 9. 1(금) ~ 9.3(일)

✧ 출몰 내용
작품 <잃어버린 마을;거주가능성을 탐색하다>는 라이브 퍼포먼스 작품 <두번째 생>을 편집한 다채널영상작품이다.
작품을 이루는 여러가지 요소들중에서 특히 사운드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일반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고 벽면을 울리는 방식으로 사운드를 송출해보려고 한다. 사운드가 듣는 감각이 아니라 느끼는 감각으로 전환해보고 싶은 의도이다. 이는 단지 장치변환 실험이라기 보다는 듣기위해 제거해야 했던 것들을 탐색하기위한 실험에 더 가깝다.


✧ 출몰 방법
런닝타임 약 20분의 6개 영상과 크기가 다른 6개의 디스플레이 , 사운드송출장치 설치





라이브 퍼포먼스 <두 번째 생>과 <잃어버린 마을 : 거주 가능성을 탐색하다>
라이브퍼포먼스작품 <두번째 생>은 1948년 4월 3일~1954년 9월 21일, 7년 7개월동안 제주도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의 희생자 14,44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528명 외, 유족 72,845명. 201912월 기준 4·3위원회 통계)의 위패와 5.18광주민주항쟁 희생자 195명의 위패를 시각화한 설치작품‘Black Ribbon’의 후속작이다.

<두번째 생>의 모티브는 나무로 만들어진 1만여개의 위패다. 작품은 위패에 새겨진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며 시작된다. 약 198여개의 이름이 불리우고 순서대로 탑을 쌓아 올리고 탑을 태운다. 태우는 행위는 제사를 지내고 지방을 태우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4.3희생자들이, 그 영혼들이 연기속에 스며들며 흩어진다. 태우는 행위는 믿음으로 비롯되기 보다는 주체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마주침에 대한 환대다. 환대로부터 현재를 살아내는 힘을 얻고 미래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생은 지속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은 잠시 스쳐 지나는 현재일 뿐이다. 두 번째 생은 첫 번째 생의 연속선에 있은 것이 아니라 독립적이다. 두 번째 생은 단절을 필요조건으로 삼지 않는 선언이다.



출몰 현장 메모
작가가 행한 퍼포먼스 영상이 크고 작은 여섯개의 화면에 재생되고 위패를 호명하는 목소리는 진동으로 바뀌어 온 몸의 감각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작업이 있는 공간 앞 벽에 몸을 기대는 관람객은 소리를 듣는 것 대신 호명하는 제의 행위를 떨리는 몸의 감각으로 경험했습니다.






Interview


나의 ‘출몰지’(장소)를 소개주세요.
제가 선택한 출몰지는 물리적 위치으로는 전주남부시장 문화공판장 작당이지만 저의 출몰지는 3일간의 예술난장 <stayfoolish_그리고>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홈페이지 / 인스타그램 / 지도링크



‘출몰지’를 그곳으로 선정하게 된 이유나 기준이 있을까요?
(그동안의 작업 리서치 과정이 답변에 드러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떤 장소, 공간, 자리가 현재에 그 기능을 다해 멈추어있다고 해서 욕망이 사라져버린 것일까? 저는 사라져버린 욕망을 다시 부흥시키려고 낡고 험한 곳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엄한 짓을 벌이는 것일까? 저의 출몰지 <stayfoolish*_그리고>는 문화예술관련 기관이나 공모사업의 지원을 받지않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독립예술축제 아니 이제는 예술난장, 또는 예술잔치입니다. 자본이 욕망을 앞세워 사람들을 들쑤셔지만 여기 예술잔치 <stayfoolish_그리고>는 서로의 환대가 욕망을 생산하는 힘은 아닌 지 확인해보는 소박한 잔치입니다. 그 소박한 시간들이 조금씩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저에게 힘이 주는 듯합니다.* Stay Foolish: 미국 네바다주 블랙록 사막에서 매년 열리는 축제 Burning Man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아 탄생한 축제로 ‘자발성, 무상성, 참여, 탈물질주의, 개방성, 공동체 정신, 자립, 예술, 기여, 깨끗한 떠남’이라는 버닝맨의 10가지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곳의 이야기로 새롭게 풀어내고자 합니다. 핵심은 '참여,' '예술,' '자기표현,' '체험'입니다.




이번 ‘출몰’을 통해서 만난 혹은 발견한 것(옵드라데크*)이 있다면?* 옵드라데크는 도시와 도시 간의 격차, 쓸모와 쓸모 있는 것을 구별하는 공간과 장소의 격차에서 나타나며  비인간, 사물, 기능성을 요하지 않은 물성으로 등장합니다. 지난 2년간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를 탐색한 여정에서 빠져나간 자리에 비어있지 않은 자리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 실체적인 이미지를 작가들이 생각하는 옵드라데크 개념으로 자유롭게 써 주시면 됩니다.
수일간을 청소하고 잔치를 준비하면서 예술가들을 만나고 의논하고 그들의 작품을 만나면서 그들의 지나온 삶들을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물음은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지나온 삶들을 모으고 모아 생각해보면 결국 ‘관계'를 지속하고 내가 이땅에서 살아내기 위해 해야하는 일들은 누구를 위한다기 보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예술이든 일이든 내가 살아가는 모든 관계망이 그 가능성을 ‘거주가능성'을 찾아 비틀거리며 한 걸음을 옮겨놓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걸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연민과 불안과 긍정과 즐거움 교차하고 나의 나약함이 발견될 때마다 현재 삶이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때로는 위로하면서 함정에 빠지고 빠져나옴을 반복하면서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그 하루를 참아내고 견디어 낸다고 해서 밝은 미래가 반겨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옵드라데크는 걸음중에 만나는 편견으로부터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나의 몸부림과 그 몸부림을 발생시키는 모든 행위자들과의 공명의 상태는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참아낸다기 보다는 어떻게 즐겨낼 것인가를 쫓아 가보려고 합니다.  



이번 ‘출몰’에서 기존에 작가님이 해 오던 작업스타일(전시, 퍼포먼스 등)과 다르게 시도해보려고 했던 지점은 무엇인가요?
가장 궁리하고 있는 지점은 퍼포먼스 작품과 영상 작품과의 차별점을 어떻게 두어야 할것인가 입니다. 12월에 선보일 작품은 라이브퍼포먼스작품을 기록한 영상물을 소재로 독립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인데 단순히 기록된 영상을 편집하는 것으로 독립된 작품이라 부르기 어렵다 생각됩니다. 프리오프닝이후 계속적으로 궁리중이고 10월 말경 참여하는 단체전시에서 다른 방식의 시도를 해볼 생각입니다. 전체 기록된 영상클립에서 어느 부분을 발췌해야하는지? 이 궁리는 다시 왜 <두번째 생>이라는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출몰지>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리서치 되고 있는 지? 처음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출몰’은 어떤 행위인 것 같나요?
낯선 것들의 잠시동안의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 낯선 것들의 나타남은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라짐은 아쉬움이면서 동시에 안도를 준다. 공공예술에 참여하는 저는 이 2년의 과정이 즐겁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뒤돌아보게 하고 더디게 나아가게도 하죠. 2년동안 벌어지는 예술가로써의 삶을 확장하기도 하고 줄여보기도 하면서 보이지 않는 길을 향해 가는 듯합니다. 글쎄요 나에게 출몰은 그 모든 과정인듯합니다. 출몰 어떤 목적하에 감행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 자칭하면서 벌여지는 일들이 모든 일들이 출몰인듯합니다. 다만 반복을 멈추지 말아야하는데 똑같을까봐 걱정입니다.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주 떠올랐던 감정의 팔레트를 만들어 본다면, 어떤 감정 단어들을 제시해줄 수 있나요?
첫번째 낯섦 입니다. 두번째는 자신에게 또는 제작되는 작품에 더 내밀하게 다가설 수 있는가? 그 내밀함은 자기고뇌로 부터 만들어지는가? 울루루에서 잠시 스쳐지나간 생각은 자기고뇌가 인간 나로부터가 아닐 지도 모른다. 나라도 믿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나에게 행위를 가하는 타자들과의 어떤 자세로 공존을 모색해야하는지? 신성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부여되는 것은 아닐까? 부여된 신성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유지하고 보살필 것인가?

세번째는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비가시적, 비물질적, 비언어적 요소의 탐구 또는 투명화전략이 여전히 허공에 있다는 것인데, 현재의 저는 <녹색계급의 출현>을 읽고서 ‘거주가능성'이란 개념을 차용하고 있는 중인데 2022년 2023년을 거치면서 ‘거주가능성’은 ‘사용자공유공간 planC [자세히 보기︎︎︎]’, ‘구들장논 굳이백배미 [자세히 보기︎︎︎]', ‘stayfoolish_그리고', ‘전주지역내 기관 또는 예술가 협업'으로 차용, 확장되고 있다. 그렇게 일련의 활동들을 연결해보고 있는 중이다.

네번째는 ‘돌봄’인데 아직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사용자공유공간 planC

구들장논 굳이백배미



방법론이자 주제로서 빈 자리에 대한 기억과 기록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사유되나요?
역사적 가치나 빼어난 풍경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공간, 장소, 건물, 가로수, 강가 등이 변화를 맞이 할 때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바라보아도 썩 좋아라고 말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변화된 모습의 저열함때문만은 아닌듯합니다. 많은 이유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한 환경조성인 듯한데 ‘더 나은 삶’이란 표현에 함정이 있는듯합니다.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는’ 이 표현도 현실 불가능한 표현인데 덧붙여 ‘더 나은 삶'은 이해가능한 표현인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된 풍경은 밝은 미래에 대한 보장이라기 보다는 사라짐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아닐까요? 살아가는 환경의 급작스러운 변화가 어렵게 부여한 ‘신성’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닐지? 더불어 나의 삶도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지? 그런 공포와 불안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제가 ‘잃어버린 마을’을 탐색하는 이유는 과거의 시간과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잊혀진 인간을 포함하는 존재들이 현재에도 함께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 태도하에서만 ‘거주가능성'을 탐색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주가능성'은 현재라는 시간이 ‘순간’일지라도 탐색되고 시도되고 반복되어 나의 사라짐이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잃어버린 마을 탐색 33개 마을 ︎︎︎


퍼포먼스 <두번째 생> 실행 8개 마을 ︎︎︎

잃어버린 마을 리서치


작가의 행위와 기억의 상호작용이 어떤 흔적이 되는지에 관한 작가의 생각/의도가 궁금합니다.
예술이 무엇인가 물으면 아직은 ‘질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작가의 행위는 단지 보여주기위해서 시도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행위가 질문이기를, 행위로부터 질문을 생기든 행위가 질문이든 감상이 아니라 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작품들은 만난다는 것은 작품만의 문제는 아니겠죠? 작가의 행위가 어디로부터 출발하는 지 알 수 없고 안다는 것이 질문을 방해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겠죠. 작가의 행위는 본다기 보단 ‘직면한다'가 더 나은 술어입니다. 작품 감상행위는 문제를 내고 그에 답을 내는 문답법이 아니라 직면해서 마주보는 것 그것 자체가 아닐까요? 그럴때만이 상호작용이, 행위자가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설령 그 작동의 결과가 오류를 만들어 내고 착각을 불러일으킨다해도 행위자간의 흔적을 남기고 누군가의 자신의 삶속에서 되네이게 되겠죠.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직면했던 자신을 보게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