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리, 풀등, 모래톱 묻히기


봄로야

2023.2.18 새, 나, 한강

“이름은 불리지 않으면 사라진다. 나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이름은 쓸모에 따라 나를 분류한다. 나는 분류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안경민물가마우지’다. 안경가마우지가 아니다. 그 새는 1850년대에 멸종했다. 러시아 베링섬에 서식했었고, 1741년 베링 탐사대의 동물학자 게오르그 스텔러가 발견했다. 보였기에, 그들 눈에 보이기에, 베링 탐사선뿐만 아니라 코만도르 제도의 난파한 이들은 안경가마우지를 사냥하여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먹었다. 탐사원은 바다에 빠져 죽을 수는 있어도, 베링섬에서 굶어 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안경가마우지는 날개가 애기 손바닥 만하다. 섬에는 날 수 있는 능력이 퇴화할 정도로 안경가마우지의 천적이 없었다. 반면 나는 인간이 알게 모르게 진화한, ‘안경민물가마우지’다. 현재는 한강에 영등포구와 마포구 사이 사람이 살지 않는 밤섬 일대에 숨어 산다. 당신이 인간이라면 나를 볼 수 없거나 있다. 세계는 공공연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방금 내 말을 제대로 들었나?

원래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기 싫어한다. 교화도 싫어한다. 하지만 요즘은 계속 지껄인다. 어차피 대부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용하는 말로 매끄럽게 번역될 수 없긴 하다. 아니, 그런데 저 정도 소개는 들어줘야 하지 않나? ‘눈가에 안경 무늬가 있어서 안경민물가마우지랍니다.’ 이건 소개도 아니다. 장황한 말투도 싫지만, 피상도 싫다. 머, 아무튼, 나는 가끔 한강 공원 벤치에 앉아 색소폰과 아날로그 기타를 치는 선율에 말을 싣는다. 작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마이크 노이즈에, 밤섬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여자의 말에도 내 말을 섞는다. 눈가에 태를 두른 안경 무늬는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 도시에 적응하면서 날개도 커졌고, 독한 미세먼지를 거르기 위해 없던 콧구멍이 생겼다. 먹이와 먹이가 아닌 것을 골라 먹을 수 있게 혀도 예민해지고 길어졌다. 부모가 누군지는 모른다. 나는 고향을 모른다. 이름은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여자가 지었다. 보였기에, 그녀는 나를 안경민물가마우지라고 불렀다.

들리나? 보였기에, 그녀가 나를, 라고 불렀다.

도시는 하루하루 살아남기에도 벅차다. 언제 쫓겨날 지 아무도 모른다고들 하지만 누군가는 이미 안다. 도시는 알면서 모르는 척해야 살아남는다. 내 말을 당신은 들을 수 있지만 듣지 않는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쉽기 때문이다. 머, 아무튼, 오래 머물 집을 찾는 건 어느 정도 포기했다. 나는 집이 없다.

2023.3.16 나, 새, 한강, 밤섬

나는 집이 없다. 요즘은 행정구역상으로 나뉜 지도의 선 위에서 지낸다.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주소가 생긴다. 선 위는 주소 없는 경계다. 세계는 공공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쫓기지 않고 살 수 있다. 오늘은 한강 공원을 정처 없이 걸었다. 영등포구와 마포구 사이 한강 공원 어딘가에서 잘 예정이다. 양쪽 구청은 선 위로만 이동하는 나를 투명 인간 마냥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판자촌이나 쪽방, 공공장소에 집을 지은 노숙인을 내쫓기에 바쁘다. 그들 눈에 보이기에, 많은 이들이 집을 잃었다. 그들은 예전부터 그랬다. 1968년, 서강 대교 아래 우뚝 떠 있는 밤섬은 여의도 쪽의 홍수 예방을 명목으로 폭파되었다. 섬의 일부는 여의도 둘렛둑의 자갈과 흙이 되었다. 무려 천여 명이 밤섬에 살았었고 섬이 폭파되면서 이들은 한순간에 실향민이 되었다. 현재 밤섬의 절반은 영등포구가, 나머지 절반은 마포구가 관리하고 있다. 서울의 땅과 집은 밤낮없이 파헤쳐지거나 매립되며 매일 지도가 바뀌었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지도의 경계선만 잘 찾으면 되었다. 선을 찾아 걷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들이 나를 찾지 못한다면 이 정도 수고는 할 수 있다. 선을 밟으며 이동하다 보니 인도만 걸을 수 없다는 게 더 어렵다. 길 위에 꿈틀거리며 지나가는 지렁이, 민달팽이, 미국흰불나방, 나방의 유충, 개미를 밟지 않는 게 훨씬 어렵다. 선을 벗어나야 할 땐 최대한 빨리 달린다. 잠자기 적당한 선을 발견하면 돗자리를 편다. 밤섬이 바람에 흔들린다. 수양 버드나무가 흩날리는 모습이다. 경계선을 따라 이동 중이다.

2022.12.1 새, 나, 부여와 청양과 공주 사이 금강

경계선을 따라 이동 중이다. 물기를 말리기 위해 다리 기둥을 받치고 있는 둥그런 좌대에 앉아 날개를 크게 펼쳤다. 그녀는 혹시라도 왕진교 관리 요원이나 순찰 중인 경찰에게 들킬까 봐 고개를 휙휙 돌리며, 내가 여행한 장소들을 궁금해했다. 이 다리의 2/3는 부여이고, 1/3은 청양이다. 이쪽 지역은 모래톱도 꽤 살아있고, 나루지구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무색하게 사람도 드물어 쉬기 좋다. 아무튼 ‘여행’이 아니라 ‘이동’이라고 고쳐 말했지만, 이해하지 못 한 듯했다. 그녀는 내가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디로 도착할 건지를 물었다.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한때 내가 철새였을 때 이 왕복 개념은 대단히 중요했다. 인간이 구글 지도를 켜서 출발지와 도착지를 찍는 것처럼, 나도 길이 있다. 새의 길. 원래 우리의 이동은 끝나는 곳이 시작하는 곳, 도착점은 또 다른 출발점이었다. 두 개의 점이 하나로 겹치면, 시작과 끝이 함께 진동하며 새 생명이 탄생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고, 그럴 수 있다. 뜬금없이 들릴 수 있겠으나, 나는 오래전부터 살아있고, 이미 죽었다. 나는 1850년, 베링섬에서 한 번 죽었다. 갈라파고스에서는 아주 작은 날개를 달고 멸종 위기 ‘취약’ 등급을 달고 살고 있다. 조선 19세기 후반, 화가 홍세섭의 <기러기, 가마우지와 새>에게 발견되었다. 17세기 화가 창강 조속이 그린 가마우지 중 한 마리도 실은 나다. 1914년, 맨체스터 가디언에 실린 ‘A Country Diary’에서 나는 가장자리에서 발견된 커다란 이방인이었다. 2007년 서해안에서 겨울 유조선과 해상 크레인이 충돌해 1만 리터의 기름이 유출되었던 사고로 내 몸은 기름에 오염되었다가 구조되었고, 그때 내 이름은 ‘태안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태안반도에 가서, 기름때가 묻은 돌을 닦았었다며 빙긋 웃는다. 그러더니 몸을 선처럼 가느다랗게 만들고 두 팔을 몸통에 최대한 붙여 내 옆에 드러눕는다.

“그럼 내 눈앞에 너는 누구야?”

“안경민물가마우지라고 네가 불렀잖아.”

“히히, 그래, 그래. 오늘 밤은 썰물이야. 여기에서 자도 되겠어.”

그녀의 몸은 노을에 물들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도 날개를 접고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내 발에 엉킨 머리카락과 먼지를 떼며 슬쩍 어루만져 주었다.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날개보다 발이 튼튼해야 해.”

다정하다. 물 냄새 섞인 바람이 몸을 감싼다.     

2022.10.21 나, 새, 회룡포, 무섬마을

물 냄새 섞인 바람이 몸을 감싼다. 모래톱에 사슴류와 새류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안보이지만, 수많은 벌레와 미생물의 발자국도 찍혀 있을 것이다. 나는 새가 아니다.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다.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휘감은 물도리다. 강이 산자락을 따라 태극 무늬를 길게 늘인 모양으로 흐르고 있다. 내 키보다 높게 자란 수풀 뒤로 굽은 물길까지 가볼까 하다 멈췄다. 새가 아닌 발자국을 굳이 남기고 싶지 않다. 이 풀등에 더 깊이 들어가면 나로 인해 동물들의 길이 달라질 수도 있다. 수면에 반사된 하늘과 물 아래 수풀이 서로를 비추고, 껴안고 있다. 물을 머금은 양에 따라 켜켜이 다른 빛깔을 띤 모래톱의 단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자갈이 잔뜩 든 뜰망 구멍마다 마른 나뭇가지가 엉켜 있다. 자동차 타이어와 자전거 타이어가 모래에 푹 박혀 있다. 가마우지 한 마리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나를 보는 건지 풀등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눈 주위에 노란 안경 무늬가 있다.

얇고 둥글게 회전하는 물줄기를 건너, 걷기 좋게 다듬은 산책로와 인근 마을을 걸었다. 집이 몇 채 있고, 논밭도 있다. 방치된 보트와 어색하게 만들어진 미로 정원, 인공 돌로 씌운 스피커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 야생 식물로 둔갑한 꽃밭이 유치해 보인다. 금방 또 갈리고 뒤엎어질 땅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조차 그리워질 것이다. 인공 꽃밭 앞에서 턱 아래에 양손으로 꽃받침을 하고 행복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나에게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한 중년 부부를 보며 직감했다. 미래에도 이 광경이 남아 있다면 모를까, 우연히 꿈에 나타나면 모를까, 나는 아마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오지 못할 것이다. 선 위에 삐뚤빼뚤 찍힌 내 발자국이 금세 사라진다. 이곳은 경계선을 따라 걷지 않아도 꽤 안전하다. 부드러운 모래톱을 이불 삼아 잘 수 있다.

2022.10.22 새, 나, 내성천, 무섬마을, 영주댐

부드러운 모래톱을 이불 삼아 잘 수 있다. 댐 근처에 머문 지 일주일째, 앞으로 일주일 정도 더 지낼 수 있다. 수문이 개방되는 기간은 고작 보름 정도다. 흰꼬리수리와 독수리가 찾아오는 겨울에는 운이 좋으면 두 달 정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도 인간이 항의해야 가능하다. 3만여 마리의 제비가 내성천에 돌아왔을 때, 나도 살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부터 들었다. 올해도 간신히 유해종으로 구분되진 않았나 본데, 내수면 양식업자와 어부들이 계속 민원을 넣고 있다고 한다. ‘태안이’를 구할 때만 해도 우리는 500여 마리를 넘지 않았다. 1999년도에는 260여 마리만 있었다. 겨울이 따뜻해지고, 준설로 강이 깊어지고, 댐과 보가 늘어나면서 현재 2만 1천861마리가 되었다. 어떤 이는 우리를 구해준다. 어떤 이는 우리를 유해종으로 신고한다. 어떤 이는 둥지를 제거한다. 어떤 이는 우리를 길들여 물고기를 잡는다.

화가 날 때면 머리에서 폭죽이 뽁뽁 터진다. 이럴 때면 내 말투는 폭발한다. 우리를 불러 놓고, 왜 죽이려고 하는지 묻고 싶으나, 도통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다. 내 눈에 인간종은 심각하게 다양하고 복잡해서 파악할 수 없다. 안 그래도 댐 안전 펜스에 꽤 오랜 시간 집 짓고 사는 거미 무리로부터, 원주에 있는 거북섬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배설물로 버드나무 숲을 초토화했다며, 둥지를 모조리 제거하고, 고사목을 솎아내 스트로브잣나무를 심었다는 소식을, 집을 잃어 하루 종일 떠돌아다니다 날개 말릴 힘이 없어 익사한 새끼 가마우지 소문을 들었다. 기름막이 없는 날개로는 자맥질을 오래 할 수 없다. 후-우. 기낭에 공기를 가득 넣었다. 녹이 고이지 않은 강줄기를 찾아 둥실둥실 몸을 맡겼다. 예민했던 혀가 부드러워지며 차분해진다. 반쯤 잠겨 살아남는 훈련이 필요하다. 

2022.10.22 나, 새, 내성천, 무섬마을, 영주댐

반쯤 잠겨 살아남는 훈련이 필요하다. 날지 않고 둥실둥실 떠다니는 가마우지를 따라다니며 간만에 선 없이 잘 걷고, 먹고, 잤다. 강이 땅의 사방을 휘감아 섬처럼 보인다는 무섬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은 지천인 서천의 강물이 유입되어 다행히 유해남조류가 거의 없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행정구역을 가르는 선 위로만 다녀야 한다. 마을을 지나 흐르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걸었다. 완전히 말라버린 해바라기밭을 지났다. 생태공원에는 잡풀만 무성하고, 포크레인이 땅을 엎고 있다. 열리다 만 수중보 위를 걸었다. 어느새 영주댐에 도착했다. 댐 근처의 강은 내성천과 연결되어 있음에도, 마치 다른 장소인 듯 분리되어 찐득찐득하고 불투명했다. 가마우지는 풀등에 앉아 날개를 말리고 있다. 댐 주변 펜스에 붙은 현수막에는 2022년 8월, 내성천 제비 숙영지 보호지역 추진을 위한 전국연대 발족을 기뻐하는 문구가 쓰여 있다. 시공사 업체와 상생 결연 맺고 풀뿌리 운동의 뿌리를 뽑은 무늬만 환경 단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써 있다. 돌아온 제비를 환영한다는 문장이 손으로 기운 조각천에 동글동글한 필치로 쓰여있다. 십여 년 전 4대강 사업이 한창일 때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운 ‘내성천의 친구들’이 지금도 여기, 저기, 이곳, 저곳을 오가며 싸우고 있다. ‘아름다운 걸 본 죄’를 업고 걷는 친구들의 발자국은 강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한 스님은 내성천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여기, 저기, 이곳, 저곳에 살고 있다. '이 땅 모든 생명에 도덕적으로 무관심하지 않으려 내 안에 힘을 저장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숨소리 같았다. 아무래도 스님은 새다. 강이다. 벌레다. 도룡뇽이다. 물고기다. 신의 목소리를 땅과 산과 강에 드리웠다가 내게 들려준다. 이들이 한 겹, 두 겹 기워 낸 말의 도톰한 힘을 받아 다시 이동한다. 선 위를 걷는 나는 새가 아니다.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다.

2022.10.23 새, 나, 영주댐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여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걷다가, 나를 살금살금 따라 오고 있다. 차로를 지나가기도 하고 인도를 가로질러 보라쑥부쟁이가 잔뜩 자란 수풀로 휘청이며 들어가기도 한다. 술에 취한 건가 싶게 비틀거리다가 허리를 꼿꼿하게 편다. 가끔 하늘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쉰다. 발 보다 작아 보이는 어린이용 푸른 슬리퍼를 양 손에 장갑처럼 끼고, 낡아서 불그죽죽한 수경을 머리띠처럼 쓰고 있다. 여자의 몸에서 아랫강 냄새가 난다. 인간인지 아닌지 애매한 스님의 냄새도 묻어 있다. 날이 진다. 누리끼리한 강의 퀴퀴한 냄새가 좀 가라앉는다. 여자는 도로방호벽을 스르륵 넘고, ‘영주댐 어드벤처 공간조성사업’ 간판을 지난다. 경고 표지판까지 모두 지나쳐 골조공사 현장 안으로 들어가더니 거미처럼 어떤 선을 따라 걷고 기어 어둠에 묻혔다. 문이 닫히고 강이 깊어지고 있다.

2022.12.2 나-너, 세종보, 한글 공원

문이 닫히고 강이 깊어지고 있다. 바다와 연결된 강은 밀물과 썰물이 오가고, 댐과 보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격하게 꿈틀거린다. 나와 새는 수심 변화가 큰 곳이라 위험하다는 접근 금지 간판을 넘어갔다. 새는 아무렇지 않게 보 위에 서서 양옆으로 고개를 휘휘 돌린다. 살얼음이 낀 강과 넓은 모래톱 반대편은 새로 만든 생태공원과 수질복원센터가 한창 공상 중이다. 땅에 붙어 자라는 습지 식물에 서리가 내려, 밟을 때마다 파삭파삭 크래커 씹는 소리가 났다. 이곳은 헌 집이 없다. 새 것투성이다. 그러나 십여 년 전, ‘4대강 살리기’ 사업 때 만든 보와 생태공원은 일부 폐쇄되고 방치되어 선 따라 걷지 않아도 될 곳이 많았다. 오래되어 빛바래고, 갈라진 시트지가 덕지덕지 붙은 표지판에 십여 년 전 산책 코스가 안내되어 있다. 있다던 선착장은 이미 사라졌다. 가려지고 떨어진 글자는 읽을 수 없고, 한글을 읽으며 합창한다던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ㅇ ㅓ ㅗ ㅇ ㅐ ㄷ ㅇ ㅗ ㅈ ㅔ ㅅ ?”

“세종대왕.”

새에게 알려주었다.

“아. 되게 웃기다.”

새가 키득거렸다.

“더 낡고 헐면 좋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길이나 간판이나 저런 조형물이나 놀이터는 치워주면 좋겠지만, 아니야, 아니야. 고쳐 쓰는 거야. 아니야, 아니야. 괜히 건드리지 말고 있는데 없는 듯 두는 거야. 강이 땅을 뒤덮든, 땅이 강을 뒤덮든.”

“그러면 나는 다시 철새가 될 수 있나?”

“모르지. 넓은 모래강이 될지, 가는 천이 되고 대부분 숲이 될지, 늪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이미 손대지 않은 강버덩은 단 한 군데도 없으니까.”

“그러면 영원히 도시 텃새로 살아야 하나?

“모르지. 지금을 초월하는 지도는 없어.”

“초월?”

새는 고개를 크게 기웃거리더니 눈을 크게 뜬다.

“너는 주소 없이 걷고 있잖아. 나와 대화하잖아. 이런 건 초월이 아닌가?”

“도망치는 거고, 너를 흉내 내는 거야.”

“그러면 안 돼?”

눈물이 내 발등에 똑똑 떨어진다.

“너-나에 그려진 지도는 시간을 벗어나고 있어. 그걸 알려면 지금이 몇 일, 몇 시인지 알아야 해.”

“너와 나? 나와 너? 우리?”

“비슷한데 조금 달라. 너-나는 너-나야.”

새의 눈이 평평하다. 이름과 쓸모가 생겨 3백 년 전 소멸한 자의 눈이다. 내 발은 이 선이 움켜쥐고 있다. 선의 용도에 따라 나는 분류된다. 나는 분류를 원하지 않는다. 선을 꽉 움켜쥐었다. 아주 꽉 밟았다.

2022.12.2 나-너, 백제보, 공주보, 금강

아주 꽉 밟았다. 선이 몸에 찰싹 붙었다. 새도 땅을 꽉 밝았다. 발자국을 보고 인간이 나와 새를 찾아 쫓아낼지, 죽일지, 살릴지는 알 수 없다. 세계는 공공연하기 때문이다. 수문으로 강물이 콸콸 쏟아진다. 기러기과 새들이 수면을 타다닥 튕기며 멀리 날아간다. 수력발전소의 양쪽 끝 모서리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쓰레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뭇가지, 공, 스티로폼, 깃털, 자잘한 쓰레기들이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돈다. 어디론가 빠져나가거나 걸러질 줄 알았는데, 쓰레기는 열 번, 스무 번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회전한다. 한강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봤었다. 태풍이 지나고 교각을 두르며 쌓인 쓰레기가 원을 그리며 회전하며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왜 물길 따라 흘러가지 않는 걸까 의아했다. 곳곳에 소용돌이 모양의 물무늬가 있었다. 도시의 강 대부분이 관리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강 아래 설계되어 있을 파이프를 떠올리니, 거대한 수영장처럼 느껴진다. 청계천은 12만 톤의 수돗물이고 여의도 물빛공원은 지하도 유출수이고, 우이천 분수는 중랑물재생센터의 재생수다. 사람 머리통만 한 스티로폼 박스, 노란 플라스틱 과일 박스, 색색의 물놀이용 공, 2미터를 훌쩍 넘게 쌓인 부유물도 놀라웠지만, 오래되어 둥글둥글 마모된 스티로폼 덩어리들이 더 놀라웠다. 오래 앓다가 뱉은 강의 이빨 같았다.

나와 새는 보를 관리하는 읍과 면, 동의 경계선에 잠시 머물렀다. 백제보에도 가로지르는 행정구역 선이 있다. 한쪽은 청양군 청남면 왕진리, 반대쪽은 부여군 부여읍 자왕리. 양쪽 다 ‘금강 5경(왕진 나루)’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다른 동네이고 다른 관리자가 선을 경계로 통제한다. 같은 나루인데 한쪽 동네는 농림지역이고 반대쪽 동네는 보전관리지역이다. 공주보에도 가로지르는 행정구역 선이 있다. 한쪽은 공주시 우성면 평목리이고 반대쪽은 웅진동이다. 보의 양 끝은 금강 6경인 고나마루 솔밭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한쪽 동네는 계획관리지역이고 반대쪽은 관광지이다. 사람이 찾지 않는 수변공원, 어린이가 없는 놀이터, 배가 없는 선착장, 억새가 없는 억새단지, 텐트가 없는 오토캠핑장, 생태해설표지판에는 있지만 없는 물고기까지 수문이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며 우왕좌왕한 흔적들이 널브러져 있다. 폐쇄된 보 주변의 썰렁한 캠핑장과 쓸모없어진 인공물이 멀쩡한 강 풍경을 괜히 썰렁하게 만든다. 흔적들 바로 옆이나 위, 주변엔 폭신폭신한 새 잔디밭으로 단장한 파크골프장, 농구장과 인공 연못과 분수대가 있는 문화광장이 들어섰다. 쇳내가 난다. 시설물 간판에서 페인트 냄새와 아크릴 가루 냄새가 난다. 20년 전에도, 50년 전에도,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이 냄새를 맛본 것만 같다. 한강에서도, 낙동강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봤다. 나와 새의 몸에 얽혀 따라온 ‘강들의 기억’이 미래인지 현재인지 모를 장면을 쏟아낸다. 

새는 나의 몸을 밀쳐 선 밖으로 멀리 튕겨내며 즐거워했다. 그럴 때마다 내 몸에 주소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나에겐 선 위로 흐르는 강은 시간을 반복하는 지도인가 봐.”

“아니래도. 반복하면서 그렇지 않은 지도로도 나-너는 이미 걸었어.”

“나-너? 나와 너? 너와 나? 우리?”

“비슷한데 조금 달라. 나-너는 나-너야.”

“선 위로 흐르는 강이 시간을 벗어난 지도야.”

눈이 흐릿해진 건지 선이 흐물흐물해 보인다.

2023.10.7 나-너, 한강, 밤섬

눈이 흐릿해진 건지 선이 흐물흐물해 보인다. 100여 대의 카메라가 한강 공원 안전 펜스 가까이 다닥다닥 설치되어 있다. 몇 백 개의 렌즈가 강을 주시한다. 사람들이 뱀이 출몰한다는 경고판을 무시하고 펜스 밖으로 넘어가 자리를 잡고 있다. 100만 인파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사람의 물결이 드나든 자리에 풀은 죄다 누웠다. 생태 보전 구역 팻말 뒤에서 자라던 억새는 모두 납작해졌다. 마구잡이로 넘나드는 인간의 무법 행위를 목격하며, 나-너는 복개천과 서강대교 아래에서 꼭 껴안고 있던 몸을 천천히 분리했다. 새는 밤섬에 숨겠다고 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일제히 숨죽여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길 빌었다.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선 위를 걸으며 이동하려고 애썼지만, 지도를 일일이 확인하며 도망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새는 밤섬으로 날아가 숨었다.  

펑!

터진다. 굉음이 하늘과 물살과 바람을 찢는다. 나-너는 불꽃이 터지는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했다. 펑! 펑! 도망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만개한 목련꽃 같은 눈부시고 하얀 불꽃이 하늘을 조각내며 후드득 떨어졌다. 아름다워, 나는 그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때 새의 비명이 바람결을 타고 들려왔다. 펑! 펑! 펑! 새의 날개가 찢겨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확히는 선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틈바구니를 엉금엉금 기어 빠져나와, 정신없이 서강대교 방향으로 되돌아 달렸다. 삑- 교통경찰이 선을 넘은 나를 발견하고 호루라기를 불었지만,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묻혔다. 다리에 올라 밤섬에 쓰러져 있을 새를 찾았다. 펑! 펑! 펑! 펑! 갑자기 눈앞에 푸르게 발광하는 거대한 행성이 나타났다. 노랗게 번쩍이는 행성의 고리가 수만 개의 별이 되어 폭발했다. 암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온몸의 촉을 새워 이미 몸이 터진 나의 새를 더듬었다. 천으로 눈을 가리고 줄 타는 곡예사처럼, 먹이를 움켜쥐는 독수리의 발끝처럼, 엉키지 않고 척척 걷는 거미처럼, 바람에 꺾이지 않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움직여, 새의 흔적을 찾았다. 내 몸을 더듬으며 너-나의 지도를 찾았다. 오늘 밤도 꿈일 거야. 그렇지? 안경민물가마우지야, 네 이름이잖아. 내 목소리 들리니? 눈물인지 핏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눈에서 흘러 내려왔다. 암전이 아닌 암흑.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새의 말이 내 몸 안쪽에서 들렸다.

“쉿! 길 없는 곳에서 또 만나.” 

202X.XX.XX 나-너, 영산강, 죽산보 

“쉿! 길 없는 곳에서 또 만나.” 

그녀는 피곤하다며 문 닫힌 죽산보 아래 조그맣게 파인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잠들어 버렸다. 찾으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작은 습지다. 풀이 높이 자라 물가를 둥그렇게 둘러 아늑하다.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과 구름을 머금은 수면, 주소가 있어도 선을 비껴 난 테두리, 가까이는 보가 폐쇄된 후 드러난 모래톱까지 나쁘지 않다. 나도 물가에 몸을 파묻었다. 노곤한 기분이 흐물흐물 뭉그러져 습지에 스며든다. 영산강 하굿둑과 소하천에서 묻혀온 허연 먼지 같은 소금 가루를 털털 떨어냈다. 조금 전 다녀온 소하천에는 바다새와 도시 텃새와 도시 텃새가 된 철새들이 바다와 강이 만나는 강어귀에 오종종하게 모여 있다. 하수처리장이 노출된 천이다. 수면이 높아지기 전 부지런히 먹이를 찾느라 바쁘다. 어차피 내가 먹을 건 없으니 놀 겸, 날개를 말릴 겸, 쉴 겸 새 무리에 들어갔다. 하천 양쪽은 아파트 단지와 모텔, 학교, 상가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아이들 몇이 학원에 가지 말고 피시방에 갈까, 말까 궁리하며 무리 지어 지나간다. 관광용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배들이 진흙 바닥에 툭툭 놓여 있다. 그녀는 바다가 시작되는 강어귀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평화의 다리’라는 흔들다리다. 그녀 대신, 새의 길을 따라 영산강에서 이어진 하천을 지나 바닷길을 훌쩍 넘어 하굿둑을 빙 돌고 되돌아왔다. 미래에도 이 광경이 남아 있다면 모를까, 우연히 꿈에 나타나면 모를까, 나-너는 아마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오지 못할 것이다. 지금과 다른 모습일지 역시 알 수 없다. 몇 번을 죽었고, 죽지 않았고, 살지 않았고, 살았던 나는 나와 함께 한번 죽었고 죽지 않았고, 살지 않았고, 살았던 그녀 옆에 나란히 섰다. 나-너는 지도 없는 도래지다. 땅의 이름은 불리지 않으면 사라진다. 이름은 쓸모에 따라 땅을 분류한다. 나-너는 분류를 원하지 않는다. 선언이 깃든 낮잠에서 깨어났다. 나-너의 몸은 모래톱에 묻혀 있다. 등이 있는 풀에 기대 서로의 몸에 푹 들어간다. 되돌아가도 매일 다를 기억이 꿈의 끝자락을 휘휘 감아 물도리가 되어 흘러간다.

작업 중인 『오독풍경』 중 발췌 © 2023 봄로야